어쩌면 시작은 2017년 8월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해외리그에서 활약했던 김연경은 제19회 아시아 여자배구 선수권대회를 위해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는 출국에 앞서 취재진에게 "이번 대회에는 이재영이 들어왔어야 했다. 소속팀(흥국생명)에서도 경기를 다 뛰고 훈련까지 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대표팀에서 빠졌다. 중요한 대회만 뛰겠다는 얘기 아닌가"라고 말했다.
대표팀 에이스인 김연경이 막내 이재영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거론했다. 김연경의 직설적인 화법 때문에 '저격'처럼 보였을 뿐, 김연경의 메시지는 '저항'에 가까웠다. 소속팀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 '금수저 후배'를 미디어의 힘을 빌려 비판한 것이다.
이에 이재영은 인터뷰를 통해 "나도 답답하다. 재활훈련 중이라 대표팀에 가면 부담만 줄 거라 생각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미희 흥국생명 감독도 이재영을 옹호했다. 그러자 김연경은 "대표 선수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이재영뿐만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선수에게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이재영에게는 미안함을 전한다"고 말했다. 메시지를 충분히 전한 뒤 김연경은 점잖게 물러났다. 둘의 갈등은 '표면적으로' 봉합됐다.
흥국생명은 지난해 현대건설에서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이다영을 영입했다. 그는 이재영의 쌍둥이 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한 팀에서 뛰며 '슈퍼 쌍둥이'로 불린 이들이 프로에서 재결합하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자매가 한 팀에서 뛰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공을 올려주는 세터(이다영)와 레프트(이재영)가 자매라는 사실만으로 민감한 이슈였다. 이후 김연경이 국내 복귀를 선언, 원소속팀인 흥국생명으로 복귀하면서 함수관계는 더 복잡해졌다. 이다영의 토스 분배를 모두가 지켜봤다. 언니에게 공을 올려줘도, 그렇지 않아도 문제였다.
프로배구에서 스타급 자매나 형제가 한 팀에서 뛴 일은 없었다. 프로스포츠를 통틀어서도 마찬가지다. 꽤 많은 자매·형제 선수가 있었지만, 프로에서 팀메이트가 되는 건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둘의 시너지 효과는 클지 모르지만, 배구는 2인조 경기가 아니다.
흥국생명은 이 리스크를 기꺼이 수용했다. 김연경·이재영·이다영으로 구성된 흥국생명의 라인업은 '흥벤저스'로 불렸다. 예상대로 흥국생명은 V리그 여자부 단독 선두를 질주했다. 흥에 취한 흥국생명은 지금까지 감지됐던 몇 번의 신호를 지나쳤다.
이다영은 지난해 12월 자신의 SNS에 "나잇살 먹고", "갑질", "내가 다 터뜨릴 거야"라는 등의 글을 올렸다. 배구인들은 물론 팬들도 이다영이 김연경을 '저격'했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김연경은 "내부 문제는 어느 팀에나 있다. 내부 문제가 있다는 건 사실"이라며 불화설을 사실상 인정했다.
이후에도 흥국생명은 선두를 달렸다. 그런데도 그들은 위태로워 보였다. '슈퍼 쌍둥이' VS 김연경의 권력관계가 코트 안팎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위험 신호가 여러 번 울렸다. 흥국생명은 몰랐거나, 모른 척 했다.
결국 지난주 이재영·이다영의 학교 폭력(학폭) 사태가 터졌다. 학폭 피해자들이라고 밝힌 이들은 쌍둥이 자매가 가한 학교 폭력을 21가지 사례로 소개했다. 매우 상세하고 끔찍한 내용이었다. 이재영·이다영도 자필 사과문을 통해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
학폭은 10년 전쯤 일어났다. 프로 입단 전 일이다. 그러나 이를 수습하고 해결해야 하는 건 지금이다. 그 주체는 흥국생명이다.
팀내 갈등과 부적절한 SNS, 그리고 학폭 폭로는 크게 보면 다 연결돼 있다. 팀 구성부터 갈등 요소가 컸고, 20대 젊은 선수들의 SNS는 구단이 살펴야 한다. 이다영이 피해자처럼 보여진 SNS 글을 보고 학폭 피해자들이 분노한 것이다.
피해자들의 아우성과 배구 팬, 우리 사회의 공분이 들불처럼 번져나갈 때 흥국생명은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쌍둥이 자매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며 공론화되는 걸 경계하기만 했다. 사실관계 확인은 쉽게 끝났으나, 구단의 입장은 15일(무기한 출전정지)에야 나왔다.
'흥벤저스'라는 흥에 취해서일까. 우승이라는 성과를 놓치기 싫었던 걸까. 선수 구성에서 위험헤지(hedge)를 하지 못한 흥국생명은 리스크 관리에도 실패했다. 그리고 사고 수습을 지체했다. 골든타임을 여러 번 놓쳤다. 그동안 여론이 악화해 배구 팬들이 받은 상처는 어떤 보상으로도 치유하기 어려워졌다.
흥국생명 배구단(구단주 조병익)은 오래전부터 '미녀 마케팅'을 즐겨 했다. 지금 그들의 현주소는 처참하다. 여전히 1위이지만, 응원과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커질 대로 커진 '슈퍼 쌍둥이'의 학폭은 16일 '월드오브발리'를 비롯한 여러 외신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영국의 '데일리메일'은 "한국은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이지만, 신체·언어적 폭력이 만연하다"고 지적했다. 프랑스·일본 언론도 학폭 뉴스를 크게 다뤘다.
김식 스포츠팀장
기사 및 더 읽기 ( [김식의 엔드게임] 흥국생명은 몰랐나, 모른 척 했나 - 중앙일보 )
https://ift.tt/3dl1Fh2
스포츠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김식의 엔드게임] 흥국생명은 몰랐나, 모른 척 했나 - 중앙일보"
Post a Comment